2008년 07월 17일
이야기가 길다
J는 말도 없이 점심 시간 전에 퇴근해 버렸다. 그날까지 마감해야 하는 업무도 해놓지 않고 전화기는 받지 않고 잠적해버려서 모두들 놀라기도 했지만, 씹을 거리가 생겨서 짐짓 즐거워하는 눈치기도 했다. 사실 J는 평소에도 자기 주장이 강하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건 상사건 상관없이 할 말은 다 해버리고 하기 싫은 일은 안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어쩌면 그동안 마음에 앙금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뭐, 어쩌면 친목회 따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가버린 것인지도, 물론 그래서는 안되는 거였지만. 엄연히 친목회는 직장 내 몇 사람만 빼놓고는 대다수에게 일거리잖아? 어쩌면 J라면 정말 그랬을지도 몰랐다.
나는 원래 아직 불쌍한 쫄따구라서 뭘 하든 첫번째에 있어야 하고, 끝날 땐 항상 마무리에 있어야 한다. 이런 게 항상 너무 억울해서 솔직히 가끔 J같은 성격이 부러울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그냥 순간이고, 난 사실 일하는 걸 좋아한다. 친목회가 끝나고 뒷정리를 마치고 못다한 일이 있어서 야근 중이었다. 사무실에는 몇몇 사람만이 남아있었고, 대충 마치고 가려던 무렵에, 갑자기 사무실 문을 열고 J가 들어왔다. 오전에 입었던 빨간색 원피스를 트명한 블라우스에 꽃무늬 쉬폰 스커트로 갈아입고 팔에는 파일을 껴안은 채 쪽진 머리를 하고 등장했다. 모두들 이 괴이한 등장에 놀라서 어이, 어쩐 일이야, 이시간에. 어디 갔었던 거야, 이거 빨리 해줘야지 일을 할 거아냐, 따위의 말들을 뱉어냈지만 J는 무표정에 파일을 곱게 껴안은 채로 사무실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J는 아무의 말도 듣고 있지 않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심상치 않았다.
나는 퇴근했다. 우리끼리니까 솔직히 말하면, 도망쳤다. 난 J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한 일주일쯤 되었나, 그때부터 J는 혼자 멍하니 앉아 있었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하루는 미친듯이 혼자 큭큭큭 웃고, 하루는 미친듯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루는 함께 출근하는데, 출근하는 1시간 동안 계속해서 죽겠다는 듯이 웃었다. 처음에야 좋은 일 있으면 같이 웃어요, 라고 했지만 1시간이 지속되자 점점 무서워졌다. 나중에, 무슨 일이냐, 라고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그녀는 네, 고민이 생겨서 밤에 잠을 잘 못자요,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자꾸 캐묻자 그녀는 열애 중이에요, 라고 했다. 조금 놀랐는데, 그것은 매일매일 얼굴을 보는 사이에 하루만에 애인이 생겼다는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J는 30대 초반의 싱글녀이고, 우리의 생활은 대부분 서로에게 일과 후에 무얼 하는지 노출되어 있으므로 나는 귀를 의심했다. 하여튼 우리의 대화는 이랬다.
"아, 무슨 일인데요?"
"열애 중이에요."
"(헉).....누구랑요?"
"짝사랑 중이에요."
"짝사랑인데 왜 열애에요."
"짝사랑이어도 이루어질 수 있잖아요."
"아...물론 그렇죠.그럼 뭘 고민해요?"
"사실은 양다리에요. 두 사람 중에서 누굴 선택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이 말이 안되는 논리 전개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떻게 해서 열애=짝사랑이라는 공식이 성립할 수 있나. 열애는 -ing형을 뜻하는 것이 아니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데, 양다리가 짝사랑이고, 짝사랑인데 열애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인가. 삼각관계도 아니고 사귀고 있는데 누군가 대쉬한 것도 아니고 홀로 두 사람을 놓고 누구를 사랑해야 할까 고민하는, 그런 거란 말인가?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멀리 있다고 하고, 근데 어떻게 만났느냐고 하자, 음악을 통해서 만났다고 했다. 한 사람은 음악을 통해 만날 수 있고 한 사람은 준비 중이라고 했다. 더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J는 '달콤한 나의 도시' 노래를 듣더니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혹시......그 남자가 이 남자....에요?"
"네."(내 귀를 의심)
"....그럼 만나 본 적 있어요?"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좋아할 수가 있어요?"
"음, 외모보다는 성격이나 취향이 더 중요해요."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에요?"
"오래된 레코드점에 갔더니 알렉스 씨의 노래는 아직 안 나왔어요. 이제 저 생각 좀 할게요."
알렉스 씨? 젠장. 일주일이 넘게 홀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던 이유가 바로 8eight와 알렉스 사이에서 갈등했기 때문이란 소리인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이것은 가수를 사랑하는 팬심도 아니었는데, 이 이야기를 하는 진지한 태도의 J를 직접 보지 않고는 내가 하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도저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는 진지하게 30분이 넘게 했고, 나머지 30분 동안 J는 계속 혼자 큭, 큭, 거리며 웃어댔다. 혼자 상상에 빠져서 무언가 즐거운 상상을 하는 상태였다. 농담이 아니었다. 우리는 둘다 진지하게 이 이야기를 했다.
오후에 J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내가 도망친 것은, 다른 이유라기보다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일이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J의 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도 갖고 있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그나마 출퇴근을 함께 한다는 이유로 내게 무언인가 말할 것을 강요할 게 뻔해서 복잡한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젠장, 나도 모른단 말이다, 하여튼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사무실을 나서자 앞에 택시가 한 대 서 있었다. 혹시 저 여자분을 태우고 왔느냐고 묻자, 택시 기사는 저 여자 뭔가 이상하다며 혼자 택시 탔다가 큰일나겠다고 했다. 택시비도 안주고 내려버렸다며 여기 직원이냐고 되물었다. 이 때 전화가 걸려왔고, 수신자 번호는 사무실이었다.
# by | 2008/07/17 23:17 | 전파상 수신지역 | 트랙백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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